끝내 완성하지 못한 원고 - 장해성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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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63년 북한으로 단신 이주한 후 김일성 대학교 철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중앙방송 정치교양국 기자작가로 20여년간 생활하다가 96년 탈북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얼마전 어느 잡지사로부터 귀순 후 한국생활중 겪었던 것 중에 제일 힘들었던 것에 관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별로 어려운 일 같지 않아 즉석에서 흔쾌히 응낙 하고 귀가후 책상에 마주 앉아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제일 힘들었던 일이 무었이었을까?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래 맞다. 생각하지 말자, 잊어 버리자 해도 시도때도 없이 파고들어 가슴 저미는 것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생각, 가족을 저 버린 아픔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우산도 쓰지 않고 인적 끊긴 아파트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하지만 그건 이미 각오하고 떠나 온 길이 아닌가? 가족생각 외에 또 무슨 외로움? 어차피 홀로 떠날 때 외로울 줄 몰랐더냐? 그렇다면 나한테 제일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던가? 영어를 몰라 간판을 보고도 몇 번씩 스쳐 지나갔던 일? 하지만 그것도 몇 번 오락가락 하긴 했지만 어쨌든 물어서라도 찾지 않았던가?
밥 짓는 것도, 빨래하는 것도 여기서는 기계가 다한다. 설사 내 손으로 하면 어떻단 말인가? 문득 한국에 오기전 홍콩 이민수용소에 갇혀있던 일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과학연구 부문에 종사하던 북한 사람과 같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귀동냥으로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우리는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게 된 것에 대해 큰 시름을 놓으면서도 새로운 걱정거리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짐지고 다니는 데 자신이 있었다. 북한에서의 기자생활은 동냥취재 20년세월이었다. 입쌀, 찹쌀, 콩, 옥수수... 필요한 건 모조리 취재 길에서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근거리는 취재차량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운전자와 전리품을 나눠야 했다. 그래서 제일 선호한 것이 등짐이었다. 명색이 기잔데 창피스럽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이마에 기자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창피가 웬 사치인가? 무거운 걸 등에지고 이십리, 삼십리, 때로는 오륙십리도 히쭉 웃으며 갈 수 있었다.
내가 한국생활 첫 시작의 묘안을 찾고 쾌재를 부르자 친구도 덩달아 손뼉을 쳤다. 친구는 용접기술 7급으로 산소용접, 전기용접은 물론 0.5mm 철판까지 다 붙였다는 것이었다. 명색이 과학자지만 자기가 연구한 건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북한이고 보니 용접은 물론 선반, 쎄바, 프레스 등을 스스로 작동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나는 장마당에서 등짐으로 그 친구는 공사판에서 용접공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하자고 다짐하면서 모처럼만에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잠자리는 당분간 역전 같은 곳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후 우리가 꾼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알 게 되었을 때에는 정말 웃음에 앞서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나라에서 집과 일자리를 주고 정착금까지 준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무엇을 한게 있다구?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도록 벽돌 한 장, 모래 한삽 보태지 않는 내가 아닌가? 오히려 방송을 통해 거리낌없이 험담을 퍼 붓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은 그런 나를 단 한가지 이유, 한 동포라는 것만으로 한 혈육이라는 것만으로 그토록 뜨겁게 맞아주고 대해 준 것이다.
그러면 나의 한국생활 체험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물론 서울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웃지 못할 실수담도 많았다. 그러나 그 자질구레한 것들이 실로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조국의 동포애와 사랑에 비하겠는가. 나는 끝내 펜을 놓고 말았다.
1999년 11월 장해성
얼마전 어느 잡지사로부터 귀순 후 한국생활중 겪었던 것 중에 제일 힘들었던 것에 관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별로 어려운 일 같지 않아 즉석에서 흔쾌히 응낙 하고 귀가후 책상에 마주 앉아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제일 힘들었던 일이 무었이었을까?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래 맞다. 생각하지 말자, 잊어 버리자 해도 시도때도 없이 파고들어 가슴 저미는 것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생각, 가족을 저 버린 아픔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우산도 쓰지 않고 인적 끊긴 아파트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하지만 그건 이미 각오하고 떠나 온 길이 아닌가? 가족생각 외에 또 무슨 외로움? 어차피 홀로 떠날 때 외로울 줄 몰랐더냐? 그렇다면 나한테 제일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던가? 영어를 몰라 간판을 보고도 몇 번씩 스쳐 지나갔던 일? 하지만 그것도 몇 번 오락가락 하긴 했지만 어쨌든 물어서라도 찾지 않았던가?
밥 짓는 것도, 빨래하는 것도 여기서는 기계가 다한다. 설사 내 손으로 하면 어떻단 말인가? 문득 한국에 오기전 홍콩 이민수용소에 갇혀있던 일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과학연구 부문에 종사하던 북한 사람과 같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귀동냥으로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우리는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게 된 것에 대해 큰 시름을 놓으면서도 새로운 걱정거리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짐지고 다니는 데 자신이 있었다. 북한에서의 기자생활은 동냥취재 20년세월이었다. 입쌀, 찹쌀, 콩, 옥수수... 필요한 건 모조리 취재 길에서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근거리는 취재차량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운전자와 전리품을 나눠야 했다. 그래서 제일 선호한 것이 등짐이었다. 명색이 기잔데 창피스럽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이마에 기자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창피가 웬 사치인가? 무거운 걸 등에지고 이십리, 삼십리, 때로는 오륙십리도 히쭉 웃으며 갈 수 있었다.
내가 한국생활 첫 시작의 묘안을 찾고 쾌재를 부르자 친구도 덩달아 손뼉을 쳤다. 친구는 용접기술 7급으로 산소용접, 전기용접은 물론 0.5mm 철판까지 다 붙였다는 것이었다. 명색이 과학자지만 자기가 연구한 건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북한이고 보니 용접은 물론 선반, 쎄바, 프레스 등을 스스로 작동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나는 장마당에서 등짐으로 그 친구는 공사판에서 용접공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하자고 다짐하면서 모처럼만에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잠자리는 당분간 역전 같은 곳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후 우리가 꾼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알 게 되었을 때에는 정말 웃음에 앞서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나라에서 집과 일자리를 주고 정착금까지 준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무엇을 한게 있다구?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도록 벽돌 한 장, 모래 한삽 보태지 않는 내가 아닌가? 오히려 방송을 통해 거리낌없이 험담을 퍼 붓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은 그런 나를 단 한가지 이유, 한 동포라는 것만으로 한 혈육이라는 것만으로 그토록 뜨겁게 맞아주고 대해 준 것이다.
그러면 나의 한국생활 체험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물론 서울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웃지 못할 실수담도 많았다. 그러나 그 자질구레한 것들이 실로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조국의 동포애와 사랑에 비하겠는가. 나는 끝내 펜을 놓고 말았다.
1999년 11월 장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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