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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장마당에서의 사형식 - 소원

작성년도 : 2004년 54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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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특별히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잔뜩 찌프린 비취색 하늘에선 한가한 싸락눈 꽃들이 드문드문 날리고 있었고 맵 짠 추위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취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전선 생의 막바지에서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땅의 민초들은 이 하루도 허둥지둥 하면서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퍼렇게 언 얼굴들에 한가지라도 더 파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무리 사회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미 사회주의다운 면모를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농민시장"이란 그 이름이 색 바래진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전에는 빗자루나 시금치씨, 배추씨 같은 것이나 들고 한가하게 앉아서 하품을 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 대신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이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시장으로, 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우치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없고 일년 365일 휴식 일도 없는 곳이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누가 나오라고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다.
"농민시장"이란 간판이 있는 200-300미터 전 구간에는 시장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틀어서서 자기들의 물건을 길바닥에 펴놓고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사라고 사정을 들이댄다. 말할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은 아예 설명서를 써 붙여 놓고 있는데 그야말로 가관이다. "꺽 꺽 막힘, 기침, 혀 갈라짐 없음" 이것은 잎담배를 펴놓은 장사군의 담배 설명서이다. 이외에도 우습꽝스러운 광고는 여러 가지이다.
떡 장사, 꽈배기 장사, 담배장사, 물장사를 하는 아낙네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 겨우 나무 몇 단을 지고 와서는 하루종일 팔려고 서있는 남정네들, 고추 가루 봉지를 들고 다니면서 사달라고 조르는 여 나문 살 되어 보이는 꽃제비(거지)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소위 "눈물 매대"라고 일컫는 곳에서는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 이불껍데기, 이불솜, 쓰던 냄비, 밥 사발, 국 사발까지 다 들고 나와 사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고 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에도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있어 참 이름을 그럴 듯 하게 잘 지은 것 같다. 눈물 없이는 팔 수가 없어서 "눈물 매대"요, 눈물 없이는 지나갈 수 없는 곳이어서 "눈물 매대"란다.
저렇게 서 있다가 저이들은 아무것도 더는 팔 수가 없을 때, 더는 저 "눈물 매대"에도 서 있을 수가 없으면 굶어 죽거나 떼거지가 되어 어디로든지 살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비좁은 골목길은 양쪽으로 늘어선 장사군들 때문에 엉뎅이를 돌리기도 힘들고 얼다가 만진창길은 흙이 진득진득 묻어 다니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넉넉하지는 못한 살림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장사에 돈벌기도 여간이 아니어서 이자를 후하게 쳐서 주겠다는 어느 중국 조선족 장사군의 말에 넘어가 온 가족의 목숨이 달려있는 북한 돈 10만원을 빌려주고 받지 못해 그 사람을 찾아 이 무산 장 마당을 찾은 지도 벌써 세 번째나 되었다. 이번에는 이 사람을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만나야 할텐데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 참에 중국에서 돈을 빌려간 사람과 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 나왔다고 하여 억하심정으로 또 무산 장 마당을 찾아왔다.
나날이 어려워지는 세상살이는 무산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근 북한의 실상, 사회주의의 면모를 보시려거든 공화국 어디에서나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는 "농민시장"을 보시면 될 것이다. 망해가는 우상제국의 참상을 아시려거든 농민시장에 와보시면 될 것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농민시장 안에 들어서니 그곳은 그래도 울타리 바깥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다. 울긋불긋한 중국산 눅거리 상품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지지고 볶는 냄새가 오간장을 다 녹여 낼 듯 하였다.
더욱더 사람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은 중국 조선족 장사군들의 행세이다. 자기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땅에 왔지만 조국이 못살고 굶주리니 원주민들을 형편없이 깔보는 것이었다. 하기는 별을 달았다고 우쭐거리며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안전원들과 보위원, 검열원들도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중국에서 나온 장사치들 앞에서 알랑거리니 그네들이 과히 그럴만도 하였다.
중국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을 찾아 여기저기 중국인 매대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시장 안이 술렁거리었다. 무슨일이 있는지를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안전원들이 나와 장사하는 사람들과 사러온 사람들을 모두 시장 한쪽으로 모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사람들을 쫓는 소리가 들끓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장사군들은 속이 콩알만해졌다. 물건을 회수하러 나온 안전부 집중 검열대인줄 아는 모양이었다.
수근거리는 사람들을 한쪽에 정열시키니 잠시후에 화물자동차에 죄수들을 50여명 되게 실어다가 차거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게 하였다. 꿇어앉힌 죄수들의 모습은 보기가 끔찍하였다.
여자들도 꽤 되었는데 처녀들도 있었다. 영하 20-30℃를 감도는 추위에 별로 걸친것도 없이 맨땅에 끓어 앉은 삐쭉 마른 그들이 죄에는 관계없이 불쌍하기도 하였고 정말 죄를 지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장 안은 삽시에 살기가 넘치고 물건을 사러왔던 사람이나 물건을 팔던 사람이나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마른침을 꼴깍, 꼴깍 삼키고 있는데 조금 언덕진 곳에 기윽자로 된 받침대를 내다가 세우는 것이었다. 조금은 정보수집이 빠른 한 남자가 귓속말로 "오늘 여기에서 교수형을 한답디다."라고 말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 사나이한테로 집중되자 그는 짧은 혀가 걱정이 되는지 제꺽 말꼬리를 흐리었다.
조금 있더니 승용차들과 수인용 차가 도착하고 승용차 안에서는 배가 불룩 나온 간부들이 내리고 수인용 차에서는 60여세 정도 나보이는 송장이나 다름없고 왜소한 사나이가 끌려 나왔다. 아마도 그가 오늘의 주인공인 모양이었다.
다 꿰진 허술한 누데기를 대강 걸치고 뼈에다가 가죽만을 씌운 것같은 누렇게 뜬 얼굴은 해골같았고 머리카락은 희끄무레한 색깔이어서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양쪽에서 계호원들이 팔을 끼고 있었으니 떨어뜨린 머리를 보나 척 늘어진 자세를 보나 가만히 놓아두어도 한시간 이상을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드디어 공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는 무산군 독산리에 살고있는 독산 농장 농장원 최복남이었고, 당년 나이 33살이었다.
그의 죄는 식량난으로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농장 소 한마리를 도살하였다. 소고기로 약간의 배고픔을 달래고 나니 고기를 팔아 돈으로 강냉이 가루라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생각으로 소고기를 땅에 파묻고 소고기를 팔 궁리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겨울이어서 소고기를 보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소고기는 통제품이어서 팔기가 그리 쉽지가 않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농장 회의실에서 군중강연회가 있다고 회람장이 왔다. 강연회 내용은 대략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은 우리나라 사회주의를 말살하기 위하여 더욱더 악날하게 책동하면서 최근 경제봉쇄를 강화하고 있다. 최근 기름사정으로 우리나라 농촌에서 뜨락또르가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축력을 많이 이용하는 것을 알고 소를 없애버려 농업생산을 파괴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국경지역을 통하여 들어오는 중국인 장사군들을 통하여 철길 레루못도 사오게 하고 소꼬리와 소 눈깔도 비싼 값을 주고 사오게 하고 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운 일부 사람들이 이러한 적들의 속생각을 알지 못하고 많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최복남은 눈이 번쩍 뜨이었다.
"바로 이거다. 소고기는 다 먹고 소꼬리와 소 눈깔은 팔아서 돈을 벌어야지."
가슴이 끓었다. 돈더미에 앉을 생각에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는 다음날부터 소꼬리와 소 눈깔을 가지고 전국을 일주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것을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고 결국은 어느 한 열차에서 철도 안전원에게 단속이 되어 7개월 동안 차디찬 감방에서 예심을 받고 오늘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리 준비한 처녀가 달려나와 최복남을 단죄하는 성토문을 읽고 나서 판결이 내려졌는데 그는 《민족반역자이고 조국 반역자이며 반혁명분자》이기 때문에 인민의 이름으로 교수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밧줄이 내리워 지고 그의 목에 올가미가 걸리었다. 1분도 안되어 그는 숨이 졌다. 하지만 안전원 사격수들이 그를 향하여 또 총을 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전율하였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로부터 3일간 무산 장 마당 높은 곳에 세워진 교수대에는 사람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쌀을 한말씩 사고 싶어도 돈이 없다. 그래서 한번에 한 홉씩도 사가는 때도 있다. 장 마당이 없이는 북한 사람들의 생활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장 마당 이용률이 높아지고 있는 형편에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이 장에가고 싶어도 시체가 너무 무서웠다.
이것은 19세기도 아니고 기원전도 아닌 바로 1996년 11월에 《사회주의 지상낙원》,《사람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1995년말 김정일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공개처형 방침을 내놓고 온 나라의 시장을 이렇게 사형장화 하였다.
《총소리를 울려 사람들을 눈뜨게 한다는 것》이다.
옛날 속담에 사흘 굶은 양반이 없다고 하였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방법 하나만으로 북한의 범죄를 없애기에는 북한의 기근이 너무 심하다. 굶어 죽으나 한끼라도 배불리 먹고 총에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매 마찬가지이다.
삶의 터전들이 이렇게 사형장으로 변하고 있는 인간생지옥에서 오늘의 북한의 인민들이 아무런 방비책도 없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
세계각국에서 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더욱더 높아지고 있는 오늘 북한만은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만큼도 안 여기고 있으며 삶이 묻어나고 행복이 넘쳐야 할 시장에서 사형식이 벌어지고 있다. 싸늘한 시체들이 사람들의 미래를 위협하며 공포를 조성하고 있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법이나 질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 마당을 사형장으로 만들기에 앞서 공개처형을 지시하기에 앞서 인민의 자애로운 수령님은 인민들의 배고픔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였을 것이다.
죽은 아버지의 시체보관을 위해서 8억9천만 달러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막대한 외화를 낭비하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총소리를 울리기 전에 순박한 북조선 인민들이 겪는 고통과 피눈물나는 생활을 조금이라도 고려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장 마당이 아닌 내 집 마당 앞에서 교수형을 한다고 해도 북한의 범죄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배고픈 인민에게 최소한 삶의 연장권이 주어지기 전에는 ...

--- 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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