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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경험이 인생 밑천이랍니다 - 김화영

작성년도 : 2003년 53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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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인생 밑천이랍니다

- 김화영

 

 

한참동안 수화기를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명단을 확인한 순간, 숨막힐 듯 밀려오는 조용함 끝에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목구멍에서부터 밀려오는 그 어떤 뜨거운 것 밖에는 느낄 수가 없었지요.

 

한국 땅을 밟은 지 2년이 채 안된 몸으로 나도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된 것입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름대로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생각하니 제 자신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습니다. 저 거리를 활보하는 이곳의 젊은이들처럼 나도 당당히 내 청춘을 가꾸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

 

남들은 스무 살 나이의 꽃다운 청춘이라고들 하지만 내게 있어 그 시절 기억이라면 정말 한시라도 떠올리기 싫습니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동안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 만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어두운 기억뿐입니다.

 

저는 함경북도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고등중학교 졸업 후 2년제 전문학교까지 나올 만큼 나름대로는 제법 기대 받던 소녀였답니다.

 

어렸을 적에 제겐 두 가지 꿈이 있었는데, 멋있는 영화배우가 되거나 큰 기업가가 되어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어리석은 생각이었지요. 특히 예술부문은 북한에서 일반 노동자 집 자식들은 생각도 못하는 일입니다. 굳이 그 꿈이 아니더라도 북한에서의 현실은 너무 암담하고 막막했습니다. 결국 현실을 벗어나고자 부모님 허락도 없이 국경을 넘게 되었고 그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땅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렇게 두 다리 편히 쭉 뻗고 잠 들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탈북자인 주제에

 

사실 한국이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따듯하게 다가 온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 있는 친척집에서 기거하며 식당 일을 나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 한국의 발전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식당에 온 한국 손님과 사소한 시비가 붙어 말다툼까지 벌이게 되었는데, 그 손님으로부터 "탈북자인 주제에"라는 말을 듣고는 그만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말았습니다.

 

내 고향, 내 나라가 못사는 탓으로 같은 동족한테도 이렇게 서러움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그래, 그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보자. 나도 한국 사람이 되어 사람답게 대접받고 살아보자

 

그때는 그 손님이 그렇게도 밉더니만 어떤 면에서는 한국행 결심을 굳히게 해 준 은인이라고 생각하니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리던 땅에서의 첫걸음

 

우여곡절 끝에 한국 땅을 밟고 나서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을 때부터 한국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술과 특기가 있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지요.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식당 주방에서 설겆이 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일은 고되고 보수도 많지 않았지만, 행복하면 할 수록 지난날을 잊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예전에 설움 받으며 고생한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좀 더 전문적인 경험을 쌓아야 겠다 싶어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사무도 보았습니다. 한국 사회는 컴퓨터를 모르고선 적응할 수 없겠다 싶어 퇴근 후에는 틈틈이 학원을 다니면서 한글타자나 엑셀 같은 기초실기도 배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만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쉽게 적응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지요. 그때마다 거주지 인근의공릉종합사회복지관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선생님들과 함께 이야기도 하고, 또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해 같이 준비하고 여럿이 함께 어울리면서 혼자만의 외로움을 털어 버릴 수 있었지요. 이 글을 빌어 선생님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대학생활을 꿈꾸다

 

회사 생활을 계속 하던 중, 나의 장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나이도 있고 하니 좋은 사람 만나서 어서 시집이나 가라 했지만, 그렇게 쉽게 안주하기에는 그간의 노력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지관 선생님들과 상의한 끝에 대학입시를 치르기로 결정하고 우선 영어공부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알게 된피난처라는 모임에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면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피난처는 우리 같은 탈북자들을 위해 뜻 있는 청년 대학생들이 만든 일종의 야학같은 봉사모임입니다.

 

모두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니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모두 돈만으로 통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부가 끝나고 나면 함께 간식을 나눠먹곤 하였는데 처음에는 느끼해서 못 먹던 피자를 이제는 제법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사이 많이 익숙해 진 셈이지요.

 

그렇게 반년 넘게 준비하고 나서 앞으로 전망이 좋다는 호텔서비스업계에서 일해보자는 생각에 호텔경영학과에 지원했고 지난 10월말 특례입학시험을 치렀습니다. 썩 잘 치른 편이 아니어서 많이 불안하고 초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조마조마 마음 졸인 끝에 비로소 합격소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대학에 가려면 비싼 돈 들여 과외공부도 해야 하고 대학등록금도 만만치 않다는데, 우리 탈북자들에게는 특례입학이 허용되고 또 등록금도 보조해 주니 국가적으로 주어지는 큰 혜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마운 혜택을 입은 만큼 대학생활도 더 성실하고 열심히 해야 되겠지요.

 

진정한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

 

한국에 온지도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일찌기 생각조차 못하던 많은 것들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길거리의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숨쉬는 것 조차 고통스러웠던 나의 스무 살 시절이 떠오릅니다. 밝고 당당한 그들이 부럽습니다.

 

막상 몇 달 후에는 나도 대학생이 되어 저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고 하니 설레임보다는 부담감부터 밀려오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인생 밑천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소중한 인생경험이 있습니다. 온갖 천대를 받으면서도 단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 수 없고 일자리조차 없어 중국 땅을 헤매며 살던 것을 떠올리면 여기서 닥쳐올 고생이야 왜 참지 못하겠습니까? 직접 몸으로 경험한 것들을 소중한 밑천으로 간직해서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꼭 이룰 겁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주변에서 도와주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도 못한 채 꿈에서만 그리는 부모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루라도 헛되이 보낼 날이 있겠어요?

꼭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된다고 하는 만큼 굳게 믿고 열심히 살아야지요.

알찬 대학생활을 마치고 나서 기회가 생기면 대학 생활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모아 글도 한번 써 볼 생각이랍니다. 다른 탈북자들이 미리 준비해서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쯤되면 나도 이제 진정한 한국인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겠지요?

그날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2003. 11. 김화영 씀

 

 

2004-11-19 20:54:23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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