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가 뒤바뀐 특수부대 - 이영재
작성년도 :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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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뒤바뀐 특수부대
- 이영재
2005년 8월 어느 날 인천공항, 어리둥절하지만 뭔가 희열을 되찾은듯한 마음가짐으로 신사풍의 사나이 3명과 뜨거운 포옹을 하며 첫 만남을 가졌다. 그들은 나를 마중나온 관계자들과 북한군 장교출신의 탈북민이다.처음 이루어지는 남한사람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고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자유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인천공항에 내렸다.나는 지금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한민국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자유인의 삶을 만끽하며 어깨를 펴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다.대한민국에서의 삶은 북한의 주체성이 확연히 발현되는 인간 중심의 연속이며 지난 힘겨웠던 시절들은 하루 빨리 잊어버리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할 것을 권하는 사람들도 수 없이 많다. 그럴수록 나에게는 더욱더 잊을 수 없는 삶의 추억이 있다. 피타는 지난세월들이!6년이 지난 오늘에도 악몽 속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은 바로 3대 세습의 독재 하에서 태어난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다름 아닌 탈북자들이다.이별을 이별이라 말할 수 없고 죄 아닌 죄로 항변도 못하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무주고혼이 된 영혼들의 절규가 간간히 나의 귀전에 스쳐간다.나의 과거는 지나온 한 많은 인생을 그대로 묻어두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그 빚이 많았지만 짓뭉겨진 청춘시절을 되돌릴 수 없는 원한은 그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었기에 미천한 글로 마음을 달랜다.나는 단란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예능적 특기를 가진 목표가 뚜렷한 소년으로 인정받았다. 어엿한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위해 운동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친구들 앞에 자랑을 뽐내며 꿈을 키워오던 사춘기 시절도 있었고 왼손잡이의 전형적인 그림재간도 가지고 자랐다.북한에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응당 군대에 나가야만 인간이 된다고 말밥에 올리곤 한다. 그 시절 나의 꿈은 군에 입대하여 꼭 사내다운 기질을 소유한 특수부대원이 되는 것이었다.썩 후에 안일이지만 북한의 특수부대는 나의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투의 제1선에서 죽어도 아까울 것 없는 노동자, 농민의 자식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진실로 특전부대는 무산계급 출신으로 무어진 특수부대였다. 북한의 도 군사동원부 계급구성 순위로 볼 때 제3부류 군 입대 초모대상자를 뜻한다.평안남도 덕천시에 군단지휘부를 두고 있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폭풍군단 예하부대 ‘우뢰’, ‘벼락’ 부대에서 근 15년간을 전사(사병)로부터 대대 군관(정훈 장교)로 청춘시절을 보냈다.가끔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17살이면 아직도 부모님들의 슬하에서 어리광을 부려야할 나이다. 그 나이에 벌써 북한 청춘들은 독재정치 김정일의 폭압정치를 위해, 김정은의 3대통치를 위해 뼈물, 짠물을 산과들에 뿌리며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청춘시절을 고스란히 묻어야 했고 부모형제들과 처자들의 운명도 책임질 수 없는 무기력한 운명, 저질스러운 운명의 길을 강박 당한다.그 당시 우리 군부대만하여도 김부자를 위한 충성경쟁이라면 인민무력부에서 “2전투훈련국의 제1선에 서있는 부대”, “‘당원 하사관부대”, “통일의 척후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훈련으로 군인들의 체력을 소모하고 30세 이상의 군사복무조례 법을 야만적으로 만들어 꽃다운 청춘시절 연인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도 만들어보지 못한 채 ‘충성기계, 인간병기’로 전락되어 동족의 머리 우에 전쟁의 불 구름을 몰고 가는데 황혼이 되기를 맹신했던 부대이다.이렇게 정신없고 철없는 사병생활과 황폐화 되는 사회의 현실들을 목격하면서 나에게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돈의 노예로 전락 되어가고 있는 일부지휘관들의 관행과 군 생활과정, 극심한 물자부족으로 병행한 급격한 전투력 저하의 현실적 모순들은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충분한 일화들이다. 또한 야외훈련 이동용 라디오와 무선기재 스피커를 통한 대한민국방송의 비법청취는 자유에 대한 희망과 갈망을 심어주었다.이때로부터 나는 군단, 여단으로 오가는 출장이 잦은 정치부 직속사관의 특성을 이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일단 대대 쌀창고와 장비창고에 비축해두었던 식량 100kg과 전투식량 초콜릿 5주야분을 군관사택 가족인 아내들을 유혹하여 던져주고 뇌물을 만들어 군단 간부부와 보위정치부에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훈련이 적고 돈을 벌기도 좋은 국경경비대 장교로 출세 시켜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당시 국경연선 경비대 확대로 특수부대 사관 군인출신들로 재직 군관 모집중이었다.고난의 시기 군인들 마음의 동요는 항변의 의지도 엿보였던 시기이다. 나의 부대에는 중대의 경리사관 업무를 담당수행하는 명준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펄펄 나는 싸움꾼 기질을 갖춘 인재였다.하지만 그는 고난의 행군(1994~연속)시작되면서부터 싸움군아니라 중대 경리 사관으로 후방일군의 역할을 도맡아 하여 심지어 그를 전투단위 후방부 대대장이란 호칭까지 가질 정도로 중대 군인들의 식탁은 항상 푸짐하여 군인들의 아낌없는 찬사 속에서 웃음꽃이 피군 하였다. 다른 중대는 하루 한 끼 죽으로 끼니를 에우는 운동을 한다며 중대 군인 20%가 허약자가 되었다. 특수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희비극이다.그에 대한 중대군인들의 평은 “중대 맏형인 중대장보다 낮다! 군인들의 식탁이 항상 푸짐하니 훈련열의도 올라가고 전투력은 눈에 뛰게 다르다.”며 한마디로 없어선 안 될 존재로 불렸다.당시 식량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군인들의 식탁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고향 떠나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최소한 허약은 없어야 한다고 하면서 주둔지역 돼지를 잡게 되었는데 이 일로 ‘군민관계훼손‘이라는 죄를 쓰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군단 보위부에 끌려가 40일간의 취조를 받은 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는 중죄인이 되었다.후에 안일지만 그는 자신이 책벌을 받더라도 중대가 전투력이 상승한다면 자신은 더 바랄 것 없다며 주변 농장의 리당 당위원장과 간부들의 집돼지만 골라가며 도둑질하여 중대원들의 식탁에 고기를 보장하였던 것이다.얼마 후 그는 군 간부들의 돼지 18마리를 도둑질한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군복무를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징역살이를 해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기위한 중대 병사들의 ‘싸인 작전’이 진행되었다. 중대의 모든 군인들은 “그의 잘못만이 아닌 자신들의 결함도 있다”며 동참하였고 중대장, 소대장들도 자진하여 당의 처벌을 받겠다며 해당 당위원회에 탄원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원래 북한에서 이런 중죄인을 감싸며 탄원하는 집단행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압박이 있는 곳엔 반항이 있는 법이다. 군인들 식탁도 보장하지 못하고 훈련만 몰아대는 군부에 대한 자그마한 항변으로 표현하고 싶다.이 사건 이후 군인들의 물질문화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이러한 도둑질은 근근이 나타나 주변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는 요인이 되어버렸다.여기에 참으로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다.어느 날 대대 아침 점검이 시작 될 무렵이다. 아침 검사에 한 병사가 도둑질한 통 돼지 1마리를 아기 업듯이 등에 메고 대오 앞에 나타났다. 참모장이 돼지를 등에 업은 채 아침점검에 참가시킨 것이다. 온 대대의 웃음을 자아냈다. 북한 주민들은 군가 “보라. 우리를 보라. 그러면 마음 든든하리라. 지도자동지군대”라는 구절을 “아무리 봐도 도둑놈의 군대”라고 비평하고 있는데 딱 맞는 말이다.이런 웃지 못 할 희비극은 북한군 당국이 군인들을 귀한 아들딸로 생각한다면 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을 위해 밤낮으로 돼지고기를 보장한 경리사관을 구원하기위해 중대군인 집체 서명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인 행동보조였다. 그리하여 중대 경리사관의 사건은 부대 조종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부대에는 이 후 ‘돼지상사’ 라는 별호가 나돌았다.군부대의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중대 군관들이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 중대 군인들의 이른바 감시속에서 사업을 원칙적으로 전개하지 못하는 현상들이다.1995년 4월 중대 1소대 부소대장은 함남도 함흥시에 고향을 두고 있었다. 이 사관은 타격 목표만 생기면 무조건 성공하는 인물이다. 목표란 물론 군사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목표’의 개념은 주민들의 생활환경침해의 ‘도둑질 목표’를 말한다. 훈련에서 연마한 기질과 능력을 도둑질에 이용하는 것이 북한군의 현주소이다.어느날 맹산군의 한 이당비서의 5층집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군인이 있었다. 바로 부소대장이었다. 그는 우리마을 우리초소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병사들과 함께 이당비서의 집을 방문 한 적이 있었다. 집에 김정일의 대회선물녹화기와 TV가 있는 것을 기억했다가 대낮에 소대 담배구입을 나간다고 중대장에게 이야기 하고는 시간을 받아 2시간동안 산을 넘어 맹산군에 도착하였다.그는 집을 감시하다가 인적이 없는 틈을 타 5층 베란다를 이용하여 침입했다. 그는 녹화기를 비롯한 중기물품 5가지를 노획하여 이미 연락하고 있던 시장 상인들에게 물건을 넘겨주고 당시 현금 3만원(당시 시세 금 1g 2500원씩 12g양)에 팔았다. 그리고 중대장에게 뇌물을 제공했고 남은 돈으로 제대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사건이 적발되어 드러난 후 대대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 기간 그는 훈련에서 수직수평밧줄타기 명수였는데 도둑질 하는데 그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사건 당일에는 2m길이의 나무 짝지발을 이용하여 5층 베란다건물을 걸고 오르내려 탈출을 성공하였다고 한다. 물건들은 전부 집안의 이불과 백포로 끈을 만들어 하강시켜 도둑질을 성공하였다고 고백하였다.이 사건 이후 대대 훈련 참모회의에서는 시가전 훈련방법의 기본요소로 이 도둑행각에 이용되었던 동작을 전투훈련방법에 이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겼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기형된 상태에서 주둔 지역 주민들의 살림을 대상으로 훈련방법을 이용하는 꼴이 된 것 이다.바로 1소대 부소대장의 ‘도둑기질’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묵인하며 단독 파견 한 것도 중대 군관가족들의 생활난과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인들의 도둑질로 얻어진 돈과 물건들은 군관가족들의 생활에 이용되고 중대의 전투식량과 기초식품, 간장, 기름까지 가족 살림에 빼돌려 군인생활에 실질적 타격을 주는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지휘관들은 이렇게 물질 부족과 자금난으로 병사들을 비정상적인 현상들에 무원칙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오늘 북한군의 실상이다. 그러다보니 경제적 노예로 병사들의 눈치를 보게 되며 원칙적으로 군인들을 이끌어 나갈 수 없게 된다.이것이 바로 남아의 기질로서 특수부대 대원이 되기를 희망했던 ‘훌륭한’ 이미지였다. 이런 형편때문에 나는 경제력을 우선시하는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국경경비부대로 옮겨가기를 희망하게 되었다.나는 1996년 모범사관을 장교로 진급하는 ‘직발 군관’으로 선발되어 강습을 마치고 정치군관이 되었다.수료 당시 30명의 군관들 중 5명은 현 군단지휘부 간부 부 대상으로 결정되어 군단지휘부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군관들은 북한군 국경경비 총국 산하 중대 정치지도원으로 배치되어 갔다.내가 정치지도원으로 배속될 당시 군부 내의 생활형편은 더 한심한 수준에 있었다. 그리하여 근 5년간을 병사생활과도 같은 힘겨운 훈련과 군인생활의 어려움은 갈수록 심해갔다. 국가의 경제가 폐쇄화 되고 황폐화 되어 가는 나라의 모습에서 정치군관으로서의 원칙적인 교육은 바랄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정훈교육을 맡은 정치군관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교양할 수 없고 사회의 현실을 묻어 버릴 수 없는 직면에 놓이게 된 것이다.장교들 중 중대단위의 정치장교들은 정치부 조직지도원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군관 군인들의 모든 생활과 사업을 종합지도 및 상급조직에 보고하고 심지어 개별 간부들에 대한 평정까지 맡아보는 조직지도원의 중책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었다. 독재사회에서 부대군인들의 삶의 선택을 좌우지하는 권력기구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당권력의 말단으로서 ‘뇌물작전’의 기본 직책이기 때문이다.당시 나는 정치장교를 선택함에 있어서 본신 임무를 충실히 하고 군단 간부부에 인맥을 넓히면 인사발령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3년 기간 간부부에 문건이 여러 번 제출되었지만 소식이 없었다.그런데 언제인가 여단 정치부 총무부서에서 업무사업 수행보조로 동원되던 도중 나의 개인신상자료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자료에는 외할아버지가 625전쟁 당시 후퇴하면서 치안대 가담으로 마른나무 장작을 몇 단 가져다준 사실이 있었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친형 역시 군복무를 마친 후 대학을 졸업하고 시 검찰청으로 입직을 시도하였지만 이유 없이 잘려나갔다는 이야기들이 상기되면서 순간 나의 뇌리를 쳤다.이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당에서 나를 써주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나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고 더 이상 군 장교생활을 필요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계급적 한계의 배신감으로 전율을 느끼며 다음해 전역 신고서를 내고 제대하였다. 북한은 계급적으로 출신성분이 문제가 된다면 간부 채용에서 제외된다.제대 명령을 받고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나온 10여년의 병사생활과 군 장교생활 5년을 충성맹세를 부르짖으며 청춘을 다 바친 33세의 노총각이 지금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가지고 있는 소지품이라야 겨우 겨울동복(경보부대 동복) 1벌, 군 관복, 야전가방, 여단 재정과에서 주는 제대비용 3000원(당시 쌀1kg 1500원)이 전부이다. 15년 세월 산과 들을 넘나들며 뼈아픈 현실들을 고스란히 안고 바쳐온 당원증 1개가 군사복무의 전 인생을 걸고 지나온 흔적이었고 그 명예를 안고 고향으로의 발걸음을 향한다. 돈 한 푼보다 못한 원한의 당원증을 몸에 고스란히 품은 채…….제대되어 고향에 와보니 그나마 특수부대 복무군인혜택이라며 고향귀가를 하여주었는데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제대군인들에 대한 편견과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전사 생활 10년을 고욕으로 시달려 죽지못해 살아왔었지만 일반 보병 구분대 제대군인들은 고향귀가도 하지 못한 것이다.군인들은 탄광이나 큰 건설장들에 무리로 배치하는 처절한 상황까지 벌어졌으며 그곳에 배치된 제대군인들의 후생시설은 군 생활과 비교 할 수 없는 더욱더 열악한 처지다. 도둑질, 강도, 살인 미수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주둔지역 주민들은 “제발 제대군인들을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기관에 항변하는 사태가 벌어지군 하였다.나라를 위해 귀한 자식들을 군에 보내 어엿한 인간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님들의 심정은 한결 같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군인들을 전부 도둑, 강도, 집단 사회적 무능력자로 만들어 아무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도 대책은 없다.다행히 고향으로 귀가한 나의 형편은 그래도 좀 낳은 형편이다. 군 장교 생활을 하였다고 시 건설부문 당비서 직책을 주었지만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식 비용은 고사하고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쌀도 없는 형편에서 공장 근로자들의 당사상사업과 생활을 돌본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당 일군이라고 공장 노동자들의 집들을 방문하면 말문이 막혀버린다.허름한 집에 집안 천정이 뚫려있고 찬바람이 부는 싸늘한 집안 구석에 앙상하게 남은 7살의 어린 소녀, 그리고 그 아래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하며 맥없이 누워있는 4살 사내애가 구원어린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방안 한 구석에는 임신 9개월이 된 아이 엄마가 넋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수심에 잠겨 있다. 이틀째 식량구입으로 떠나간 남편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다. 참담하고 도와줄 길이 없는 나는 발길을 돌렸다. 이것이 바로 당일군인 내가 돌봐야 하는 공장노동자들의 생활 형편 이었다.양심의 가책은 있어도 나라도 해결방도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노부모님과 가족이 하루 식대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에서 안타까운 현실에 하소연할 곳 없이 길가에 넋 없이 주저앉아 자신만을 한탄하던 기막힌 세월이었다.그래도 집이라도 있고 기다리는 부모라도 있는 아이들은 좀 낳은 편이다. 지금도 굶어가며 길거리에서 핏빛 없이 쓰러져가는 꽃제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더 이상 당의 정책과 노선은 나의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나는 당 비서 직책을 버리고 장사에 몸을 실었다. 내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이웃나라 외국상인들과의 거래를 위하여 인민보안성(지금의 인민보안부)소속 무역회사의 직업을 얻어 중고차 판매도 하고 밀수로 마련한 한국 드라마도 보면서 일정하게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하지만 나에게는 시련의 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악순환의 연속으로 해당 당위원회에서는 나를 “당의 신임을 저 버리고 개인의 향락에만 눈이 먼 당원, 양심을 버린 배은망덕한 행동의 대상”으로 낙인찍었다.보위부의 거듭되는 감시 하에 죄 아닌 죄인으로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악형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를테면 외국인 불허금지법 위반과 한국비디오 유포죄로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당시 2004년 11월경부터 130명으로 구성된 ‘중앙당 비사회주의 그루빠’가 출동한 것이다. 중앙당 비사회주의 그루빠의 집중 검열로 내가 살던 지역에서만 180세대가 혹독한 12월의 추위에 다른 산간지역으로 추방되어 재판을 받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밀수, 밀매, 한국비디오 시청 유포대상 등 정부의 ‘반 사회주의체제를 시도하는 자’들이라는 죄명하에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이 사라져 갔다. 누구는 수용소로, 누구는 재판장으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져 갔다. 이러한 사태는 함경북도 회령시, 무산군, 온성군, 은덕군 등 국경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40여 일간의 보위부 감방에서 나는 비둘기 조형 등 각종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새벽의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손목에는 쇠고랑을 차고 홑옷을 입고 우랄(러시아 모터사이클)에 실린 채 짐승처럼 끌려 다녀야 했다. 나와 관계되는 인물들을 색출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꿈속에서 악몽을 꾼다.어느 덧 시간은 흘러 더는 나와 관련된 자를 색출할 수 없다고 결정한 보위부에서는 나에게 가석방을 결정하였다. 그들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나는 한동안 집안에서 부모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보위부의 감시를 피해 비 인륜사회, 북한독재를 저주하며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들과 기약 없는 길을 떠나며 이별의 약속도 없는 채 눈물의 두만강을 건넜다.감옥에서의 현실체험은 북한의 법적제도의 현 실태와 독재정권의 꼭두각시로 인민들을 폭압하고 탄압하는 정치적 폭력기구로서의 북한의 현 실상을 체험하게 한 계기로 되었다.북한독재는 자기체제에 절대복종하고 그의 사상을 절대화하는 길만이 천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참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인간 독재자로 자칭하면서 수령위대성으로 과대평가하여 인민들을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정신적 불구자로 전락시키는 것이 북한권력자들의 사상공세이고 전략이다.이러한 순간순간들은 북한 인민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넣게 하였고 수많은 탈북민들이 사랑하는 고향산천을 떠나 목숨을 걸고 자유를 선택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이제 그들은 그 시절의 연약하고 순종하는 인민이 아니다. 어제 날의 원한을 박차고 자유와 민주를 향해 노력하고 있다. 통일된 자유대한민국,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한 탈북민들의 발걸음은 빠르게 줄달음 치고 있다.북한독재자 김정은의 세습통치를 끝장내고 통일의 그날을 앞당길 의지를 굳히며 오늘도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2012년 5월 이영재
2012-12-12 02:47:20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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