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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사랑에 감전된 전기기사 - 장천식

작성년도 : 2004년 62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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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감전된 전기기사

- 장천식

 

 

프롤로그

 

인생의 길은 멀고 험해도 그 길을 개척하는 데 보람이 있는 것 같다.

탈북주민 사회적응 교육시설인하나원교육을 마치고 본격적인 한국생활을 시작한지 불과 1년 반 남짓이 지났으니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이었고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가 배어 있는 힘든 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면서 지난 시간을 정리하다보니 그러한 고생이 없었더라면 지금같은 성취도 없었노라는 확신이 든다. 역시 사람은 고생하는 만큼 더 발전하고 성숙해 지는 것 같다.

 

한국인으로서의 첫걸음

 

임대주택이 배정된 서울 강서구에 입주수속을 마친 것은 20028월이었다. 나보다 앞서 탈북해 이미 정착하고 있던 누이와 조카가 와서 대강 짐을 정리해주고 함께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나니 더는 할 일이 없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 무얼해서 어떻게 먹고 사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하며 가까운 한강가를 찾아 배회하기 일쑤였다. 한가롭게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저 강물은 갈 곳이라도 있는데 나는 과연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앞길이 막막하고 서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맥이 풀린 채 담당형사님께 도움을 청했다. 담당형사님은 그 다음날로 나를 이끌고 영등포구 고용안정센타를 찾아 갔다.

그곳에서 담당직원의 설명을 듣고 나니 취업을 위해서는 북에서의 경력과 관계없이 기술수준과 용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재교육이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직원은 친절하게도 마침 인근에 있는 서울공과전기학원에서 국비로 무료교육을 하고 있는데 9월초부터 개강한다는 귀중한 정보까지 알려 주었다.

그길로 학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고 바로 등록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5개월의 기능사반과 그보다 수준이 높은 4개월의 기사반 과정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선 기능사반에 등록하였다. 원장님은 내가 탈북자라는 말에 반색을 하시며, “실은 전에도 탈북동포 3명이 등록을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아무도 과정을 다 끝내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었습니다. 주선생은 꼭 끝까지 마치고 자격증을 따도록 하세요. 내 적극 도와드리리다.” 라고 고무해 주었다. 남들이 끝내지 못한 일이라는 말에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로부터 3개월간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기사 자격증을 목표로

 

기다리던 개강 첫날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등교를 하였다. 첫날인 만큼 원장선생님이 직접 학원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셨고, 이어서 교수님들 소개와 친교시간도 가졌다. 학생수는 모두 30명이었는데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고 기사시험을 준비하고 있거나, 다른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서 전기기사 자격을 추가로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카톨릭 교회의 수녀님도 있었고 회갑이 지난 노인도 있어 특이했다. 특히 학급장으로 임명된 이선생은 뚱뚱한 체구인데다 28개월째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금번에는 기어이 자격을 따겠노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모두들 배움이란 한가지 목표를 향해 열성이었고 어느새 나 역시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 한가지만으로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고 학원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을 지내보니 먼저 등록했던 탈북자들이 왜 중도에 그만두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전기용어가 대부분 영어인데다 계산수식 역시 책으로 볼 때는 이해되어도 말로 들으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힘든 수업을 간신히 마치고 나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그러던 중 충수염 수술로 10여일을 입원하고 나니 거의 자포자기수준이었다. 그때 원장 선생님과 교수님들, 그리고 학급장 이선생을 비롯한 동료수강생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을 것이다.

원장님은 실의에 빠져 있는 내게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소? 하다보면 이해가 되는 법이니 미리 실망하지 마세요. 이번 4개월간 다니다가 안되면 다시 시작해도 되니 한번 하는 데까지 해봅시다.” 라고 격려해 주었다.

교수님들은 강의가 끝나면 그날 배운 것을 개별적으로 다시 강의해 주면서 용어가 어려운 것은 두번 세번 반복해서 쉽게 해설해 주곤 하였다. 동료들도 함께 꼭 자격증을 따자며 힘을 북돋아 주었으니 그 고마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던 중 기능사 필기시험 일자가 다가왔다. 자신은 없었지만 한번 시험삼아 본다는 생각에 응시하였는데 결과는 운 좋게도 합격이었다. 그때 주변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던지, 특히 동료수강생인 백선생은 실기시험 준비하라면서 자기 돈을 들여 10만원이 넘는 공구들을 사 주어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막상 실기시험장에 들어서 시험문제를 본 순간 깜짝 놀랐다. 도면표기는 만국공통으로 알고 시험대비에 소홀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도면상의 모든 기호와 내용이 낯설었다.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고 그간 도와준 주변 분들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원장님과 교수님들은 늦게까지 학원실습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열쇠까지 만들어 주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사실 기능사 시험에서의 불합격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배우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라!

이 단순한 진리를 얼마나 빨리 깨닫느냐가 얼마나 빨리 정착하느냐의 관건이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어설프게 알고 있던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정신자세가 중요하다.

그로부터 하루에 4시간 자고 10시간 공부하는 강행군 끝에 다음 시험에서는 너끈히 합격, 비록 기능사이긴 했지만 첫번째 국가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학원 교수님들과 동료들이 함께 기뻐해 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잊을 수 없는 첫 직장의 추억

 

4개월의 학원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애초에 목표로 했던 기사 자격시험까지는 아직 3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컴퓨터를 배우기로 했다.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컴맹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거주지 인근 복지관의 프로그램에 등록, 본격적인 컴퓨터 수업을 들었다. 낮에는 컴퓨터를 배우고 저녁때는 기사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먼저 학원에서 같이 공부했던 이선생에게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직자리가 하나 생겼으니 이력서를 내보라는 권유가 들어왔다.

공부도 공부지만 당장 직업 없이 지내는 것도 할 일이 못되어 취직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산동에 있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아가 면접을 보았다. 소개했던 이선생이 내 얘기를 미리 잘 해 주었던지 면접을 무사히 끝내고 다음날부터 출근하게 되었다.

첫직장인 아파트는 세대수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신축건물로 시설도 잘 정비되어 있어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관리과장님은 내게 시간날 때 조용한 지하실에 가서 공부나 하라며 배려해 주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참으로 많은 책을 보았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스스럼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하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친절하게 잘 답변해 주었다. 특히 관리과장님은 틈나는 대로 한국사회의 여러 단면과 거기에실패없이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심껏 설명해 주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지내다보니 어느덧 기사자격 필기시험 일자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관리사무소측의 배려로 시험준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시험결과가 발표되던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합격여부를 문의하였는데 결과는 뜻밖에도 합격이었다.

그때의 기쁨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관리사무소에 도착하고나니 모두들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모습에 가슴 뭉클하였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실기시험까지는 한달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학원에 가서 실기시험 특강을 등록하니 원장님과 교수님들 모두 축하해 주고 수강생들 앞에서 비결을 가르쳐 달라며 야단이었다. 이후 한달간은 낮에는 아파트 관리를 맡고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강의를 듣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관리과장님은 그 한달동안 퇴근도 미룬 채 대신 근무를 서주며 야간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면 따듯한 음식을 장만해 놓고 기다려주곤 했으니 그 정성은 피를 나눈 형제사이라도 쉽게 따라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너무 미안해 하면,

 

내가 선배다 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걸세. 자네도 곧 기사가 되어 다른 데로 가면 거기서 후배들한테 그렇게 대해주면 돼.”

 

북한에 있을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배운 것과 내가 직접 한국사회에서 체험한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이웃의 사랑이 있었다.

 

그해 6월에는 실기시험도 끝나고 오랫동안 고대해 왔던 전기기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날 저녁에는 아파트 대표회장님 주최로 특별한 회식이 있었다.하나원을 나온 뒤 술은 입에 대지 않기로 했지만 이날만큼은 취하도록 마셨다.

아니, 술에 취했다기보다는 뜨겁고 진한 이웃의 사랑에 감전되어 버렸다고 하는 게 더 나을 듯 싶다.

다음날 대표회장님과 관리소장님이 찾기에 가보니

 

우리야 주선생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지만 이제 기사자격도 갖춘 만큼 조건 좋은 일자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소? 그때까지 관리사무소에서 부지런히 업무를 배우도록 하세요.”

 

그날부터 관리사무소 직원들로부터 전기 사용량 계산법, 시설물 유지보수에 관한 사항, 용역업체와의 거래문제 등 여러가지 업무를 배웠다. 근 한달 간을 눈코 뜰 새 없이 배우다보니 대강이나마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김포의 한 관광호텔에 전기주임으로 취직이 되어 당산동 아파트와는 아쉬운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떠나는 날 주민들은 나를 위해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사실 그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만큼 정이 많이 들었다. 비록 근무기간은 얼마 안되었지만 지금도 그들의 따듯한 정을 떠올리면 고마움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1급 호텔의 전기주임이 되어

 

새로운 직장에서는 내가 전기분야의 책임자로 일하게 되는 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사장님을 포함해 전직원은 40여명 정도 되었고 온천 사우나와 찜질방을 비롯해 객실이 70여 개나 되는 제법 규모가 큰 1급호텔이었다.

출근 첫날 진공청소기를 사가지고 갔다. 변전실, 발전기실 청소부터 시작했다. 다음은 지하실 정리에 들어가 쓰지 않는 배선은 걷어내고 배전함과 분전함을 정리했다. 지하 1층부터 지하 3층까지 기본적인 정리작업에 3개월 정도가 걸렸다. 누전을 없애고 지하설비의 자동화도 완성되었으며 객실의 고장난 전기설비도 한달여를 애쓴 끝에 모두 살려냈다. 지하실에서 걷어 낸 못쓰는 배선만 한 트럭이나 되었다.

입사 석달만에 봉급이 180만원까지 올랐고 특별 보너스도 20만원이나 받았다. 액수를 떠나 내 책임하에 이루어낸 첫 성과라 흐뭇하였다.

그 사이에 어려움은 참으로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당산동 아파트를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모른다. 기술적 문제에서부터 자재 구입에 이르기까지 필요할 때마다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당산동 아파트를 찾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포근하고 편안할 수 없으니 마치 시집간 딸이 친정집을 드나들 때의 심정인 것 같다.

 

지금은 회사에서 당당히 전기주임으로서 내 몫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도 겪었고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의 충동도 여러번 느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새롭게 다시 출발하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그동안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전기공사 기사시험에도 합격하였고 지금은 소방설비 기사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에는 3개의 기사자격을 목표로 하고 있고 앞으로 5년 안에 11개의 기사자격과 2개의 기술사 자격을 딸 생각이다.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목표를 정해서 성실히 노력해 나간다면 정착이 그리 먼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탈북 동포들이 있다면 이 말을 꼭 들려 주고 싶다.

 

하루하루를 새롭게 시작하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당당히 대접받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2004. 2 장천식 씀

 

 

2004-11-19 20:56:05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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