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마을 학생과 아랫동네 선생
책 정보
‘동족에 대한 증오를 통한 사회 결속’(박노자)으로 소통했던 분단 한반도의 20세기는 참으로 불행했다. ‘남이냐 북이냐’ 목숨 걸고 사생결단하며 다름과 차이들을 증오하던 시대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이제 겨우 ‘남이나 북이나’의 시기로 진입했지만, 코로나19와 지구촌 경제불황으로 우울해진 사람들은 닫힌 일상에 지쳐가고 무관심에 빠져든다. 우리를 다시 행복하게 할 한반도의 평화는 오래된 분단 관습과 집단편견들을 넘어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실질적인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은, ‘뽕도 따고 님도 보고’처럼 해야 할 일도 하고 즐거이 하고 싶은 일도 하는 개인과 집단 삶의 일상에 스며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우리와 다른 국적과 문화를 품은 다름들과 적대감 없이 공존하는 일상을 엮어가야 한다. ‘남도 북도’ 함께 윈-윈 하는 창조적인 상생의 지혜를 되살려야 한다.
2001년 셋넷교실로 시작하여 2004년 개교한 정규형 비인가 대안학교인 셋넷학교(탈북청소년 교육공동체)의 배움은 삶의 주인인 ‘나’를 돌아보고 새롭게 살핀다. ‘나’를 사랑하는 개인들과, 내 안에 깃든 신비를 들여다보는 개인들이 일상의 중심이 되어 자신의 미래와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찾아본다.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은 매일매일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이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성공을 욕망하는 자본주의 전투요원을 양성하는 기술이 아니다. 내 삶의 현장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작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새롭게 배운다. 부모와 교사들의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꿈과 의지를 스스로 찾고 키운다.
셋넷학교가 꿈꾸는 <자유>는 자신과 타인에게 무책임하지 않다. 공동체에 무례한 자유가 아니다. 셋넷의 <자유>는 관용(寬容)의 관계방식이다. 관용은 ‘타인도 나와 똑같은 정도의 진실을 지니고, 지켜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기 소르망)’하는 적극적인 이해와 수용의 태도다. 일상에서의 관용은 법정스님 말씀처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비로소 가능하다. 나와 적이라는 욕망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자본시장 너머 비(非)적응이 필요하다. 부단한 체험과 훈련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려는 구체적인 자유의 몸짓이 관용의 실체다.
셋넷학교가 품는 또 하나의 꿈은 <소통>이다. 자기다움으로 채워가는 자유는 타인과 집단의 권위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를 돌보는 자치(自治)는 내 몸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름과 차이들이 구체적으로 느껴지고 드러나는 곳이 몸이다. 몸 안팎에서 수많은 갈등과 조정과 타협이 이루어진다. 타자와의 관계를 건강하게 맺고 풀기 위해, 각자의 몸이 다름과 차이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배려하는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 모방에 급급해하지 않고 나다운 고유한 표현을 드러내는 일상의 소통이 소중한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다양성 다문화시대 한반도를 생기 있게 되살릴 평화는, 분단으로 생겨난 이방인들과 평등하게 소통하고, 다양성에서 비롯된 다국적인 문화차이들이 따뜻하게 공존하는 ‘평화감수성’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통일부 하나원에는 하나둘학교가 있다. 탈북청소년들은 누구나 여기를 거친다. 남한 사회 정착을 위한 기본교육을 세 달간 받고 사회로 나온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 그냥 사람 청소년으로 지켜주고 키워줄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세운 대안학교가 ‘셋넷’이다. 2004-2022 셋넷의 교육과 활동은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유쾌했다. 돈도 없이 공모사업 지원금과 후원금만으로 19년을 버텼다. 가난했지만 당당했고, 간섭받기 싫어한 대안학교였지만 교육부장관상과 통일부장관상을 탄 학교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래의 시험공간이었던 셋넷학교의 역사와 경험을 우리 사회에 꼭 새기고 싶고 알리고 싶어 책을 출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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