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독재의 정석 - 비교정치로 알아채는 수령제의 내구성
책 정보
북한이라는 정치 현상에 대한 비교정치의 해부학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그렇기에 가장 많은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따라서 가장 위태로운 나라, 하지만 어느 나라보다 튼튼하고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한 나라. 바로 북한이다. 이런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이 책의 저자인 정치학자 한병진은 북한이라는 정치 체제를 단일 행위자로 간주한 것에 기존 북한 연구의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즉 북한을 수령과 엘리트로 분해해 비교정치적 도구를 사용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북한을 이해하려면 변동성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 특유의 “수령 체제”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무기는 비교정치학이다. 이 책은 정치학뿐 아니라 경제학, 심리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 도구를 활용해 북한을 분석한다. 북한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조정의 법칙”을 통해 설명하고, “죄수의 딜레마”로 수령에 대한 엘리트의 충성 메커니즘을 파악하며, 미시경제학의 분석 도구를 활용하여 북한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펴본다.
북한은 어떻게 체제를 유지하는가?
- 사회심리학의 창을 통해 본 북한 체제의 안정성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는 비결은 조정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승객들 서로 불안한 눈빛을 나누지만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상대의 행동을 관찰한다. 하지만 그 상대방도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서로의 서로에 대한 오해이다
북한의 수령제 아래서 민중은 살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다수의 선택을 따라야 한다. 속마음과 무관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공개적 행동을 수령제의 철칙에 맞춘다. 그래서 모두가 속으로 수령 반대를 외쳐도 변하는 것은 없다.
다수의 선택에 자신의 선택을 맞출 이해가 강할 경우 개개인은 각자가 관찰하거나 예상하는 다수의 선택을 따른다. 이것이 조정이다. 북한이라는 체제에서 개인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모두가 믿는 생각에 자신을 맞춘다. 공동 지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벗어날 용기를 낼 수 없기에, 벗어나는 순간 곧바로 숙청되기에, 다수의 선택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북한의 엘리트
- 김정은은 어떻게 ‘수령’이 되었는가
근대 이후 통치자의 3대 세습은 드문 일이 되었다. 수많은 독재자가 등장하지만 2대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도 힘들거니와 세계 정세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북한은 특수하다. 절대다수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데도 절대 권력은 튼튼하다. 무시무시한 공개 처형과 열광적인 군중 집회가 일상이다.
북한의 안정적인 체제는 절대권력의 수령과 순진한 만족자인 소수 엘리트의 관계를 통해 파악해야 한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김일성부터 김정은까지 수령의 절대권력은 내부 엘리트 간의 “죄수의 딜레마”를 통해 이어져왔다. 엘리트의 경쟁자는 수령이 아니다. 같은 엘리트다. 이들은 수령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서로 치열한 눈치 게임을 벌인다. 자신이 누구보다 더 충성스러운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안달한다. 수령의 연설이 끝나도 누구도 박수를 멈추지 않는다. 멈추라는 손짓에도 불구하고 박수는 끊어지지 않는다. 누구도 먼저 박수를 멈출 수 없다. 최소한 옆 사람보다 오래 쳐야 하고 크게 쳐야 한다. 그런데 수령이 말을 하는 동안 안경을 닦고, 다리를 꼰 채 앉고, 꾸벅꾸벅 존다? 그들은 바로 숙청 대상이다. 숙청의 사유는 “불경”이 아니다. 바로 “종파”였다. 수령 이외에 다른 충성의 대상이 생겨선 안 된다. 1956년 종파 사건 때부터 지금까지, 북한이 가장 금기시한 것은 바로 종파였다.
탈북민은 과연 북한 체제에 위협이 될까?
- 탈북민을 통해 보는 ‘저항’과 ‘탈주’의 메커니즘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99도까지는 끓지 않는다. 물이 끓어 주전자에서 넘치지 않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불을 끄는 것과 뚜껑을 여는 것이다.
흔히들 탈북민이 늘어나는 것이 북한의 체제가 불안정한 증거이며, 체제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한병진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북한의 수령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업은 안전 자산인 묵종하는 수동적 신민과 태생적 반항아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미 99도에 이른 북한 인민들에게 타고난 반항아의 존재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반항아는 위험한 존재다. 이들은 북한 체제에 불만이 가득하며 그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다만 이들의 저항은 개인적인 저항이다. 탈북민의 영웅적 저항은 “탈출”이다. 체제의 변화와 전복이 아니라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주체적이고 용감한 자는 혁명의 심지가 되고 사람들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하지만 탈북은 그런 용감한 자가 떠난다는 것이고 혁명의 연쇄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가 제시하는 가설은 “고난의 행군처럼 북한 내부의 어려움이 깊어질 경우 국경수비대의 간격을 예전보다 늘려 탈북을 더 쉽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은 어느 때보다 탈북을 봉쇄하고 있다. 2021년 10월 탈북 가족을 끝까지 추적해서 처단하라는 김정은의 담화가 있은 후 국경경비 초소의 간격을 좁히고 수비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아직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야 할 만큼 북한 사회에 불만이 쌓이지 않았거나 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자신감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책을 읽는 방법
- 공산주의와 수령제를 주제로 한 사회과학 콘서트
이 책은 먼저 북한 정치를 관통하는 여러 정치적 이론들을 살펴본다. 특히 1장에서는 독재의 원리, 권력투쟁, 공산주의 제도의 인센티브, 집단행동의 어려움, 국가 건설, 전체주의의 퇴행, 정치 변동, 시장개혁 등에 관한 이론들을 다룬다. 2장에서는 북한 정치의 여러 수수께끼를 풀어본다. 논의의 큰 줄기는, 수령은 인민 생활을 개선할 통치는 (고의로) 몰라도 어떤 어려움에도 권력을 지키는 지배 원리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의 위력, 순차적 숙청, 가난한 국가의 흔들리지 않는 지배, 탈북의 미학, 수령의 고의적 무위無爲인 시장개혁과 테러의 부재 등을 포함한다,
3장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은의 지배 기술을 비교한다. 여기서 독재의 일반적인 원리를 관통하면서도 신생 수령과 세습 수령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볼 수 있다. 4장에서는 북한 소식을 접할 때 주목해야 할 지점을 다룬다. 이를 통해 북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또한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의 중국 식민지화, 통일 헌법 등을 검토하고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는 남한 주체사상파(이하 주사파)의 잘못을 되짚어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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