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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망향 시인의 한 - 김대호

작성년도 : 2000년 60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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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 시인의 한

- 김대호

 

 

나는 85년에 군복무를 마치고 한 직장에 배치되어 근무하다 87년부터 남천화학연합기업소에 다니게 되었다. 94년초부터는 외화벌이 사업을 하였는데 무역관계로 처음 중국출장 지시를 받은 나는 가족들에게 "출장 갔다 오마"라는 말을 남기고 북한을 떠났다. 어린 두 딸에게는 "이쁜 신발을 사가지고 올께"라는 약속까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문학소년과 같은 여린 가슴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노래하던 나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거지의 나라로만 알고 있던 남한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 낸 것을 알게 된 후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었으며 그러한 심정을 편지에 적어 북한에 있는 아내에게 보냈다. 그런데 편지는 아내에게 전달되지 않고 북한당국의 손에 들어갔다. 북한당국은 그 편지 내용을 문제삼아 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결국은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 이곳에서의 생활은 행복할 수가 없었다. 설사 이곳이 천국이라 할지라도 나 혼자서는 도저히 행복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버렸다는 죄의식에 늘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죄의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우선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우여곡절 끝에 내 가족은 황해도 어느 광산으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아내는 자살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슬픈 소식을 들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한 여인의 삶을 너무도 비참하게 해 놓았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매일같이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갑자기 숨이 막히곤 했다. 때로는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갚아야 할 죄값이 너무 크기에 그 길을 택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에 살고 계시는 이모부가 가족 소식을 전해주셨다. 내 가족이 추방된 것은 확실하나 아내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살아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서 곧바로 가족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 보았다. 그러나 내 뜻과는 달리 결국은 가지고 있던 재산마저 모두 날리고 빚까지 지게 되어 집도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관에서 친구 집으로 그리고 교회의 작은 방에서 또 어느 낯선 마을로, 이곳 저곳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가 된 것이다. 이후 3년동안 밥을 먹지 않고 생식을 하였으며, 때로는 금식하거나 강냉이 한 줌으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다. 사랑하는 부모처자와 형제들을 버렸다는 죄의식이 너무도 컸기에 내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강요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고독과 고통속에서도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월간지 북한에 2년동안 수기를 연재하였고, 자전소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과 시집 가장 슬픈날의 일기 행복 등을 출판하여 이산가족의 아픔과 그 절박함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언젠가는 열릴 통일축제를 준비해 나갔다. 나의 한과 통일에 대한 소망을 담은 시와 노래로 통일축제를 열어 이땅에 통일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조금이나마 이바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던중 모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기쁨의 집을 찾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여러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고독의 울타리에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갚아 나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수년동안 길러온 수염과 머리를 잘랐으며 생식도 중단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기쁨의 집 식구들과 함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음악그룹을 조직하고 거리 콘서트를 통해 중국에서 고통받고 있는 탈북난민 돕기 서명운동을 벌였고, 815일 광복절에서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민족사랑과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와 노래라는 주제로 통일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또한 음식점도 차렸다 작년 10월 은행으로부터 창업자금을 융자받아 경기도 고양시 통일로변에 북한 음식점을 개업하였다. 천여평의 아름다운 정원속에 건평 60평 규모로 자리 잡은 이 식당에 북한의 음식문화를 남한에 전하고 우리민족의 동질성을 음식맛으로 회복하고 싶은 의지에서 내가 평양에서 단골로 드나들던 고급 음식점 상호를 그대로 옮겨 평양 안산각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뿐만 아니라 금년 3월말에는 도봉산 유원지내에 직영점으로 마천령 순대집을 개업하였다. 우리 식당에서 순대를 맛보고 그 맛에 감동을 받은 고객이 도봉산 유원지내에 체인점을 열게 된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4월중에 10여곳의 체인점으로 확장될 것이다. 함경도의 전통음식인 마천령 순대가 이렇듯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으니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아무튼 뜻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니 크게 번창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에게 차려진 복 그대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바지 하고 싶다. 끝으로 북한에 두고온 딸애들을 그리며 지은 시 "들꽃의 눈물"을 한 수 적으며 이만 필을 놓으련다

 

밤새

덥고자던 안개를

훌 훌 걷어내고

기지개를 편 청산은

 

오늘도 아침 햇살에 세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데

새벽 이슬을 머금은 한떨기 들꽃을 보니

문득

가슴 쓰리도록 서글퍼 지는 것은

 

이해에도 봄맞이 한 제비가

어김없이 찾아가는 저 북녘의 하늘 아래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밤새 울었을 딸애의 처량한 모습이

이 한떨기 들꽃에 어려있기 때문이거늘

 

나는 손수건을 꺼내

스치는 바람에 조차 의지할 곳 없이

흐느껴 우는

들꽃의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인다

 

사랑하는 아가야

지금 네가 살고 있는 그 고통의 세월이

설사 지옥일지라도

꼭 살아서 기다려 다오

내 다시 돌아 갈 통일의 날까지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

이 아빠는

너의 눈물을 닦아 주며 비로소 말 하련다

아직은 할 수 없는 그 말

부디 용서해 달라고.......

 

아빠는

그날을 떳떳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20004월 김대호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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